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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같은 글

쓰다 보니 여름의 낮처럼 길어진 글

by 왕짱구 2022. 5. 7.

  나는 여름밤 행성에 불시착해서 둘이 걸어 다니는 상상을 했다. 너와 이야기하면 혼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빨리 시간이 흘러 늘 아쉬웠다. 게다가 인터미션 없는 무대 위에 배우처럼 쇼를 하다 보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 보니 차라리 불시착을 한다면 좋을 것 같다 생각한 것 같다. 위를 올려다보니 밤하늘보다 더 검은 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엄청 가깝게 느껴졌고 하늘이 멀리 있는 것 같아 사방이 아주 어둡지는 않다 생각했다. 이렇게 밝잖아! 좀 더 걷자고 소리쳤다. 그것은 사실 걷는 척하며 좀 더 이야기하자는 소리다. 생각해보니 불시착 행성인데 돌아갈 집이 어디 있겠어. 숨을 곳도 찾지 않고 여유롭게 산책이나 하다니 말도 안 된다. 허점이 없는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했다. 능력 있는 감독들이 영화 구상과 스케치에만 몇 년을 보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어제 나의 상상은 여름밤 행성의 17평 정도를 구상해 올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청소하고 살기에 적당한 17평. 그러다 우리가 한날한시에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둘 중 더 건강한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평소 꾸준히 운동을 하지 않은 상대방을 원망할지라도 그리 어려운 선택은 아닐 것이다. 남겨진 사람이 지독하게 외로울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둘만 남겨지는 극한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 사이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침묵이 서로를 얼마나 외롭게 하는지는 쉽게 느낄 수 있다. 5분만 카톡을 주고 받아도 알 수 있으니까. 다른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닌데 다양한 이유로 서로의 말에 침묵하는 지금도 침묵의 미래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침묵의 미래」는 말의 영이 머무르다 화자를 떠난다는 이야기다. 태어난 말의 영은 단숨에 그의 소년 시절 꿈, 마침내 도달한 곳, 다시 찾은 고향, 죽기 전 마지막 숨까지를 학습하며 하루를 살기도 하며 노인으로 태어나 하루 더 늙은 노인으로 죽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 하루는 그의 역사만큼 길며, 노인의 하품만큼 짧다. 한 언어의 마지막을 살다간 영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흥미로운데 간단한 말이라도 말의 영이 느껴지는 때가 있었고 반대로 아주 장황하고 세련된 말이라도 영이 떠나 죽어버린 말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의 영은 너무 아름답고 정교해서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으나 결국 홀로 받아들이는 이야기. 그래서 눈 감기 전 나의 말을 알아듣는 누군가가 한 명쯤 곁에 있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이야기. 마지막을 말하는 고독하고 쓸쓸한 이야기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다. 

태어나 내가 처음으로 터뜨린 울음, 어쩌면 그게 내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죽기 전,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어떤 이의 절망, 그것이 내 얼굴이었을지 모른다.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그것이 내 표정이었는지 모른다. 범람 직전의 댐처럼 말로 가득 차 출렁이는 슬픔, 그것이 내 성정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 이름을 못 왼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순 있다. 당신이 누구든 내 말은 당신네 말로 들릴 것이다. 

눈 감기 전, 그는 자기 말을 알아듣는 누군가가 한 명쯤 곁에 있길 바랐다. 나이나 성, 직업 또는 성격은 상관없었다. 상대가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 '응'이나 '그래' 같은 아주 간단한 말이라도, 그뿐이라도.

다 죽고 살아남은 건, 오직 자기 자신과 엄청나게 아름답고 어마어마하게 정교해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그 '말'뿐이란 걸 결국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침묵의 미래-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입동-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계절이 가는 줄도 모르는 것일까 계절이 맡은 몫을 실감하는 일일까. 

 

웃음 고인 아이 입매를 보자 목울대가 매캐해지며 얼굴에 피가 몰린다. ...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리는 손-

  부모는 자식을 자유롭게 바라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웃을 때, 화를 낼 때, 힘들고 아파할 때 매번 아이의 얼굴을 살피며 나의 몫을 찾을 것 같다. 자식을 돌보며 내가 준 무언가 때문에 안심하거나 불안하거나 때론 죄책감도 느낄 것 같다. 착하고 건강한 아이이길 바라는 만큼 내가 부모로서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의심할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보다는 포착하기 어려운 애매하고 틈 사이를 비집고 스며드는 악하고 약아빠진 것들이 걱정될 것이다. 내가 덮어두고 외면했던 나의 어두운 면들. 예를 들면 돈이 없어 불만족스럽고, 귀찮고 권태로움, 열등감을 느끼는 나를 알아채기도 전에 그것들이 아이에게 묻고 마는 무서운 경험. 아차 얼른 감춘다 해도 얼굴에 피가 몰리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