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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같은 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by 왕짱구 2021. 12. 25.
우리가 그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오직 삶의 불행한 이면이라면,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우리가 왜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지를 생각해본 적 있어?
순례자들은 누구를 사랑했을까.

 

나는 항상 기분이 들떴다. 엉성한 모양이 하나의 완벽한 도형이 되듯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내가 좋았다. 동굴이 깊을수록 날이 어두울수록 서둘러 걸으면 발걸음도 가벼워진다는 듯이. 그러나 마음먹는 일은 점점 부담스러웠다. 드넓은 바다처럼 시원한 그늘이 있는 나무도 되어보고 가끔은 새빨간 해 질 녘 노을처럼 사랑받고 싶었을까. 그러다가 마음이 지치면 포기하고 만다. 오 이건 제가 찾아 헤맨 도형이 아니네요. 죄송합니다 지나가겠습니다. 하나의 도형이 된다는 건 나를 잃는다는 건데 뭔지도 모르면서. 엉성한 생김새를 채워주는 것 역시 불가능할 텐데,,,?
인생은 쉽지 않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긴 인생, 불쑥불쑥 맞닥뜨리는 불행 속에서 나의 결핍을 아무런 이유 없이 세상과 맞서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내 잘못도 아닌데!!! 할 때마다 옆에서 같이 주먹을 부들거리며 서있어 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나로 살아야 한다. 더 이상 쿨한 척 이해하는 척 불만 없는 척은 금물이다. 허물을 덮어주길 바라면 방에서 이불이나 덮으라지. 적당히 뜨겁길 바라면 밖에 나가서 봄볕 햇볕이나 쬐라지. 우리는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감정의 물성

물성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가.

허름한 가게에서 크리스탈 무늬의 컵을 샀다. 나의 점잖은 코스터 위에 얹어 고소한 라테를 마시고 싶었다. 그 컵이 왜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친구에게 너는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얼마나 나의 공간과 잘 어울리는지라고 대답했다. 마치 9900원이면 행복을 살 수 있다는 듯이. 이렇게 원하면 언제나 행복을 내 손안에 쥘 수 있다는 듯이. 다만, 조금 우울감이 내려앉은 나의 공간에는 무성의하게 쌓여있는 책들과 곳곳에 내려앉은 먼지, 손길이 닿지 않아 눌어붙은 얼룩이 있다.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다는 듯이. 털어내고 슥 닦아내고 그것을 쓰레기통으로 지금이라도 처박아 버릴 수 있다는 듯이. 폐 속으로 들어오는 ‘우울감’ 입자에 무기력하게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